요즘 ‘영또’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서 자주 보입니다. ‘영국이 또…’를 줄인 말입니다. 혹시 여기서 무슨 뜻인지 눈치 채셨다면 인터넷 뉴스깨나 보셨다고 자부하셔도 좋아요.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영또’는 영국의 기상천외한 연구 결과에 대한 네티즌들의 조롱 섞인 반응입니다. ‘英 연구’라는 말머리와 함께 등장하는 기사 제목이 언뜻 보기에 황당무계한 내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보고 판단해 보세요. 최근 연구들을 보시죠.

2015.8.24

햄스터 그물침대
사주면 더 행복해 해

사육장에 그물침대와 담요를 달아주면 햄스터의 행복감 상승

2014.7.12

방귀 냄새 맡으면
암 등 질병 예방된다

방귀 냄새 성분인 황화수소를 들이마시면 뇌졸중∙심장마비∙당뇨병 등 질병 치료에 도움

2015.10.09

마늘 먹은 남자의 냄새에 여성이 매력을 느낀다

마늘의 항균 작용이 겨드랑이에 사는 세균을 죽여 냄새를 완화시킴

‘영또’에 해당하는 기사 목록은 이어집니다.

테트리스, 금연에 도움

조각맞추기에 집중하다 보면 흡연 욕구가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

(2015.8.15)

배트맨, 지금 복장으로 하늘 날면 착지시 사망

배트맨 복장을 입고 추락시 궤적을
물리학 법칙으로 풀어 증명

(2012.7.10)

도둑들이 가장 선호하는 운동화는 리복 클래식

도둑들의 발자국을 분석해 가장 빈번히 등장한 운동화 종류 도출

(2010.2.13)


별 연구가 다 나오네.
솔직히 저런 연구가
실제로 있는 건지 의심스러움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영국은 정말 안 하는 연구가 없네” “진짜 연구 맞는지 의심스럽다” 같은 반응을 주로 보였습니다. (물론 연구 결과에 흥미를 나타내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나, 설마 사이코패스?’라는 기사 댓글을 보면 “이거 단 거 먹게 하려고 설탕산업이 뒷돈 댄 거 아닌가” “이런 연구에 내 세금이 쓰인다니..” 라며 한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연구들이죠?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어쩐지 그럴 듯 합니다.


좀 더 파헤쳐 볼까요?



英 연구팀,
‘햄스터 그물침대 사주면 더 행복해 해’

햄스터 사진

이 기사는 영국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 연구진이 ‘왕립 오픈 사이언스 저널(Royal Society Open Science)’에 실은 연구결과를 담은 것입니다. 번듯한 대학교가 번듯한 저널에 실은 연구입니다. (얼토당토않은 연구가 아니라는 거죠)

연구진은 “햄스터는 어린이들의 첫 애완동물로 사랑받아요. 햄스터에게 편안한 환경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건 동물의 복지에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애완동물 소유를 없애지 못한다면, 이들에게 적합한 환경이 뭔지를 파악하고 만들어줘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저 웃어넘길 연구는 아니지요.

방귀가 질병을 예방한다는 연구 역시, 황화수소가 세포에 활력을 줘 사멸을 막는다는 결과를 내놓은 겁니다. 황화수소가 방귀의 성분이기에 기사 제목에 뽑혔을 뿐이죠.

다른 연구들도 모두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 도출됐습니다.

물론 모두 저명한 과학저널에 실린 연구는 아닙니다. 햄스터 관련 연구가 실린 ‘왕립오픈사이언스저널’은 2014년 창간된 일종의 ‘대안’ 과학저널입니다.



과학계 권위 있는 저널들이 폐쇄적인 시스템이라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이에 도전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오픈 사이언스’를 위한 저널인 거죠.

권위가 없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지난 달 대전에서 열렸던 ‘세계과학정상회의’도 ‘오픈 사이언스’ 논의로 들썩였습니다. ‘오픈 사이언스’는 말 그대로 과학자들끼리만 하는 폐쇄적 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해서 모두의 힘으로 과학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움직임입니다.

영국의 한 교수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맨체스터대 천체물리학과
필 다이아몬드 교수


천문학에선 학자들끼리
연구 자료를 개방하고 교환하는
오픈 사이언스가 좋은 영향을 미쳤다.
대중의 접근이 어려운
폐쇄적 과학 연구는
발전 속도가 느리다.

기상천외한 연구를 다룬 기사가 쏟아지고, ‘오픈 사이언스’ 같은 혁신적 움직임이 벌어지는 영국에 대해 한국 학자도 높게 평가합니다.

서울대 과학철학박사
장대익 교수


그저 이상한 연구 결과만
쏟아지는 것 같지만
과학에 대한
언론과 일반인의 관심이 높기에
벌어지는 현상

이런 영국이 받은 노벨과학상 숫자는 84개로 미국, 독일에 이어 3위입니다. 노벨과학상 0개인 우리로선 부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시콜콜한 연구까지 할 수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영국의 분위기. 이게 그 나라 과학자들이 인류에 공헌하는 엄청난 연구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요.

이게 바로 우리가 황당해 보이는 연구 결과를 ‘영또’라며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