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나는 개돼지다 이다

대한민국에서 닭으로 사는 법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 밝았다.
닭들에게 지난 2016년은 악몽 같은 해였다.
사상 최악의 조류인플루엔자(AI)로 약 2582만 마리(전체 가금류 3033만 마리, 2일 기준)가
영문도 모른 채 땅에 파묻혔다.
‘닭의 해’ 2017년은 닭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해가 될 수 있을까.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 밝았다. 닭들에게 지난 2016년은 악몽 같은 해였다. 사상 최악의 조류인플루엔자(AI)로 약 2582만 마리(전체 가금류 3033만 마리, 2일 기준)가 영문도 모른 채 땅에 파묻혔다. ‘닭의 해’ 2017년은 닭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해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닭사랑 대한민국의 닭사랑

한국인의 닭 사랑은 유난하다. 옛부터 새벽 닭 울음소리는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환영받았다. 축사(逐邪ㆍ귀신을 물리친다는 뜻)와 다산(多産)을 상징한다고 해서 전통 혼례 때도 닭이 빠지지 않았다. 닭튀김ㆍ삼계탕은 ‘국민 먹거리’다. ‘치맥(치킨+맥주)’의 경우엔 한류 바람을 타고 대표적인 한국식 식문화로 해외에 수출까지 되고 있다.

한국인의 1인당 닭 소비량은 연간 12.6kg(2015년 기준). 삼계탕에 많이 쓰이는 6호(0.6kg) 닭을 기준으로 한 사람이 매년 21마리 이상의 닭을 먹는 셈이다.

수요가 많은만큼 국내 닭 사육 규모는 매년 빠르게 커지고 있다. 2016년 2/4분기 현재 1억 8070만4177마리로 30년 전(1985년 2/4 분기, 5290만9901마리)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그래도 수요를 다 맞추지 못해 해외에서 수입도 많이 한다. 2015년 국내 닭고기 수입량은 1억699만4146㎏였다. 80% 이상을 브라질에서 수입한다. 국내산보다 값이 싼 브라질산 닭고기는 주로 치킨ㆍ닭갈비집 등에서 많이 쓰인다. 수입량에 비하면 훨씬 적지만 수출도 한다. 닭 사육할 땅이 적은 홍콩이나 고급 닭고기 공급이 부족한 캄보디아 등에 2015년 2330만2322㎏를 수출했다.

닭의 수난 시대 닭의 수난 시대

한국인들의 열렬한 닭사랑에도 불구하고 국내 닭 농가는 최근 10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2006년 이후 총 5차례나 번진 AI 때문이다.

2006~2007년 AI로 닭 390만 마리가 살처분 됐다. 사상 최악이라는 올 겨울에는 무려 2582만(2일 기준) 마리가 땅에 묻혔다. 10년간 거의 국내 인구수에 맞먹는 4600만 마리의 닭이 비명횡사한 것이다. 더구나 살처분되는 닭 가운데는 ‘무고하게’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4~2015년 AI로 살처분된 1396만 마리의 가금류 중 869만8241(62.3%) 마리가 음성판정을 받았다.

데이터로 보는 닭의 수난, 조류독감 피해 닭 살처분 수 4675만 마리, 억울한 죽음 869만 8141마리, 조류독감 피해액 약 1조 8400억원
데이터로 보는 닭의 수난, 조류독감 피해 닭 살처분 수 4675만 마리, 억울한 죽음 869만 8141마리, 조류독감 피해액 약 1조 8400억원

살처분이 늘면서 피해 규모도 급증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AI로 인해 2006~2007년 582억원, 2008년 3070억, 2014~2015년 약 4000억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집계했다. 2016년 피해액은 1조 원이 넘을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조금씩 늘어가던 닭고기 수출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우리나라는 2016년 8월 세계동물보건기구(OIE) 규약에 따라 ‘고 병원성 AI 청정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AI가 번지면서 불과 3개월만에 청정국 지위를 잃게 됐다.

닭이 수난을 겪는데엔 열악한 사육 환경도 한몫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축산업 등록제에 따른 농림부 고시’에 따르면 무창계사(창이 없는 사육시설)에선 1㎡ 당 무려 39여 마리(10호 닭 기준)의 닭이 모여 살아야 한다. 움직이거나 날개도 제대로 펴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 위생 관리나 바이러스 전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명한 소비자 현명한 소비자

AI는 한국인들의 ‘닭사랑’에는 영향을 미쳤을까. 일반인들의 예상과 달리 그렇지 않았다. 총 1300만 마리의 닭ㆍ오리를 살처분한 2014년 국내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역대 최대치인 12.8㎏을 기록했다. 전년도(11.6㎏)보다 오히려 1.2㎏가 늘었다.

모인필 충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AI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상당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16년 대한민국을 휩쓴 AI 바이러스(H5N6형)는 국내에선 아직 인체 감염 사례가 없다. 중국에선 17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지만 모두 양계농민이었다. 주거지와 양계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중국 농가의 특성 탓이 크다는 게 질병관리본부 설명이다. 닭을 직접 접촉할 일 없는 일반 소비자의 경우 감염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것이다. AI 바이러스는 섭씨 75도로 가열하면 5분 만에 죽기 때문에, 닭고기를 푹 익혀 먹기만 하면 된다.

살처분이냐 백신이냐 살처분이냐 백신이냐

대재앙 수준의 AI파동에도 소비자들이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부 대응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축산업 등록제에 따른 농림부 고시’에 따르면 창이 없는 사육시설(무창계사)의 경우 닭을 1㎡ 당 무려 39여 마리(10호 닭 기준)까지 기를 수 있다. 닭이 날개 한번 제대로 펴기 힘든 환경이다. 적은 면적에 밀집해 닭을 기르다 보니 한번 바이러스가 돌면 대규모로, 빠르게 전염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제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전체 산란계의 32.1%(2245만 마리, 2일 기준)가 AI로 살처분 됐다. 반면 친환경, 무항생제 등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산란계 양계농장은 89곳 중 1곳에서만 AI가 발생했다.

1㎡ 당 39마리, 축산업 등록제에 따른 농림부 고시, 10호 닭 기준 A4용지보다 비좁은 닭의 보금자리. 닭 한마리에게 주어진 공간

정부는 지금껏 AI가 돌면 살처분 방식만 고수해 왔다. AI바이러스는 쉽게 변이를 하는 탓에 백신 만으론 완벽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백신을 사용하면 AI 청정국 지위를 잃게돼 수출을 포기해야한다는 경제 논리도 내세웠다.

하지만 2016년 최악의 AI사태를 계기로 백신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충남대 수의학과 서상희 교수는 “백신을 사용할 경우 50억 원 수준에서 AI 바이러스를 빠르게 잠재울 수 있다”며 “지금껏 AI로 수조원의 국가적 손실이 발생한 걸 생각하면 백신 사용이 살처분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백신 사용 뒤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난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 백신에 모든 것을 기대는 건 시기 상조”라며 “AI 항원은행을 만들어 ‘최후의 수단’으로 백신을 사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예정”이라고 말했다. AI 항원은행을 만든다는 것은 다량의 바이러스를 냉동상태로 미리 보관해 놓는 걸 말한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이 항원을 통해 즉시 백신 완제품을 만들게 된다.

살처분이냐 백신이냐

더 중요한 시스템 방역 더 중요한 시스템 방역

“중요한 것은 살처분이냐 백신이냐가 아니라, 뻥뚫린 방역체계를 제대로 정비하는 것”이란 지적도 있다. 역대 AI 발병 사례에서 보듯 우리 정부는 체계적인 방역에 번번이 실패했다. 중앙의 컨트롤 타워 없이 지자체 별로 산발적인 대응을 하다보니 ‘발병 24시간 내 방역ㆍ소독’ 같은 기본 원칙 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뒤늦게 수습에 나서 살처분을 해도 곧바로 다른 지역에 AI가 번지는 ‘뒷북 대응’이 화를 키운 경우가 많았다.

2016년 한국과 같은 시기에 AI가 발생한 일본은 180도 다른 정부 대응을 보여줬다. AI 발생 당일 아베 신조 총리가 관저에서 위기관리센터를 가동했다. 이를 통해 이동, 살처분, 소독시설 등을 통제하며 재빠른 방역에 나섰다. 결국 100만 마리를 살처분 하는 선에서 AI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발병 26일 뒤에야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송창선 건국대학교 수의학과 교수는 “선진국처럼 위기 상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위기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컨트롤 타워를 통해 ‘시스템’으로 대응하는 방역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