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책 사려면 버스로 1시간”…서점 찾아 ‘삼만리’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 사는 김영화(43·여)씨는 초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종종 서점에 들른다. 자녀들에게 필요한 문제집을 사고 자신도 보고 싶은 책을 사기 위해서다.

김씨가 책을 사기 위해 서점까지 가는 시간은 무려 1시간. 거주지인 봉화군에 서점이 한 군데도 없기 때문에 인근 영주시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다.

김씨가 사는 봉화군은 경북 안에서 영양군·청송군과 함께 대표적인 낙후 지역으로 꼽힌다. 이른바 'BYC 지역'이다. BYC는 봉화·영양·청송군의 이니셜을 따 이르는 말이다.

서점 주간(11월5~11일)과 서점의 날(11월 11일)을 앞두고 한국서점조합연합회 등은 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한다. '책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서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봉화에 사는 김영화씨처럼 책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나가야 하는 곳이 전국에 수두룩하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6 출판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전국 229개 지역(기초지자체 226개+세종시+제주시+서귀포시) 가운데 봉화·영양·청송 등 경북의 일곱 군데와 인천시 옹진군, 경기 여주시, 강원 홍천·평창·정선·고성·양구군, 충남 청양군, 전북 임실·진안·무주군, 전남 신안·강진·함평·곡성·구례군, 경남 함안·산청·의령군 등 27곳엔 서점이 없다.

서점이 1곳뿐인 이른바 '서점 멸종 예정 지역'도 경남 함양군, 전남 장성군 등 35군데다.

인구대비 서점이 가장 적은 기초지자체는?
※ 지도에 마우스를 올리면 지역별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 출판산업 실태조사'

점차 서점이 사라지는 시대적 흐름이 '서점 0곳' 지역을 만들어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가 2년마다 발간하는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지난 2015년 말 기준으로 전국 일반서점 수는 2116곳으로 2013년 말과 비교해 215곳(9.2%)이 감소했다. 1996년 5378개로 정점을 찍은 전국 서점 수는 20년 새 70% 이상 줄어들었다.

이 중에서도 전용면적 165m²(약 50평) 미만 서점이 187곳 줄어들며 전체 감소 서점의 8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측은 이를 "출판 경기 침체와 독서인구 감소, 임대료 상승 등 제반 비용이 늘어나면서 소규모 서점들의 경영난이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2년간 줄어든 '순수(문구점 제외)' 서점
자료 : 전국서점조합연합회 『한국서점편람』
※ 차트에 마우스를 올리면 지역별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점 주간을 앞두고 봉화군과 인천 옹진군, 전남 신안 군 등 서점 없는 대표적인 지역의 주민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이들은 "온라인 서점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오프라인 서점만의 특·장점이 있다. 서점이 없어 너무 아쉽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놀이터 들르듯 서점을 찾는 도시 아이들과 비교해 학력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높다.

인천 옹진: “깜깜이 책 주문” 한숨 짓는 섬마을 선생님

지난해 초 인천시 옹진군 소청도 '섬마을 선생님'이 된 정효진씨는 서점이 없는 불편함을 몸소 느끼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발령 초기 아이들이 읽을 교재와 책 구입에 애를 먹었다. 1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옹진군은 서점이 들어서기 어려운 여건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25개 섬엔 서점이 한 군데도 없다.

대청초교 소청분교 도서관 책장
소청도는 물론 백령도와 대청도에 서점이 없어 교사들과 학생,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사진은 학교와 교사들이 조금씩 사들여 모아 온 대청초교 소청분교 도서관 책장. [사진 대청초교 소청분교]

정씨는 처음엔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했지만, 그마저도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다. 아이들 수준에 맞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없어서다. 그나마 학교와 교사들이 조금씩 사들인 책들이 대형 책장 2개를 채우고 있어 학생과 주민들이 책을 볼 수 있는 정도다.

정씨는 "어떨 때는 엉뚱한 책이 오거나 나름 고민해 구매한 책도 내용이 다르거나 형편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지금은 그냥 2주에 한 번 꼴로 인천에 나갈 때 사온다"고 했다.

지난 23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영흥 공공도서관에서 만난 이혜연(43·여)씨도 주변에 서점이 없어 공공도서관을 찾는다고 한다. 이씨는 올해 초 남편 직장 때문에 인천에 살다 이곳에 왔다.

이씨는 "이곳에선 책을 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며 "그나마 도서관에서 책을 접할 수 있지만 신간은 거의 없어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인천으로 나가서 책을 사 온다"고 했다. 실제 영흥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은 인천 송도와 경기도 안산 단원구에 있다. 거리로 45km,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전남 신안: 간판은 서점, 파는 물건은 모기약ㆍ썬캡

지난 17일 찾은 전남 신안군 지도읍 '지도서점'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잡화점으로 업종을 바꾼 경우다. 낡은 간판이 달린 상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점의 책 진열 공간을 빼곡히 채운 것은 책이 아닌 모기약, 작업용 장갑, 선캡 등이었다. 서점이 아니라 잡화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 지도서점
전남 신안군 지도읍 지도서점. 간판과 달리 현재는 책은 거의 팔지 않고 잡화점에 가깝다. [프리랜서 장정필]

서점 주인 이훈남(82)씨는 아버지에게서 서점을 물려받아 운영했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책을 찾는 사람이 줄고 이후 인터넷 서점이 발달하면서 서점 운영을 포기했다. 대신 각종 생활용품과 학용품을 들여와 판매한다. 이씨는 "책 파는 일을 그만두고 시계를 수리하는 기술을 배웠다"고 전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서점이 없거나 부족한 농어촌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도시 아이들에 비해 학력이 떨어지고 문화적으로 소외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임천석(88·전남 신안군)씨는 "과거 작은 서점이라도 마을에 있을 땐 자연스럽게 찾아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며 "지금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에만 빠져 지내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했다.

초등학생 손주들을 둔 김정숙(56·여·신안군)씨도 "아이들 책은 어른들이 읽는 책과 달리 그림 등이 많아서 직접 보고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딸이 손주들을 위한 책을 살 때는 인터넷 서점보다는 대도시 서점을 이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경북 영주 : 63년된 서점 "한 달에 잡지 열 권도 안팔려"

1954년 문을 열어 경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영주시 '스쿨서점'도 매년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송태근(50) 사장은 "인터넷·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고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며 "한때는 잡지 판매가 월 300권을 넘을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한 달에 10권도 채 팔리지 않는다. 사전은 아예 안 팔린다"고 전했다.

그는 "시대가 변한 만큼 오프라인 서점들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면서도 "하지만 아직 인터넷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이 많고 직접 보고 골라야 자신에게 맞는 책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따져 본다면 오프라인 서점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쿨서점에서 만난 손님 이은주(44·여)씨도 "동네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기능뿐만 아니라 시골 마을의 유일한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한다"며 "주민들이 오며 가며 서점에 들르는 일이 문화적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해주는 효과를 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경북 영주시 스쿨서점
1954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경북 영주시 스쿨서점. [김정석기자]

1992년 폐지된 '도서정가제'도 서점 쇠락의 요인으로 꼽힌다. 오명영(58) 인천서점협동조합 부조합장은 "199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가 도서정가제를 폐지하면서 온라인 서점과 대형서점들이 할인 공세를 펴는 바람에 서점들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며 "동네 서점의 마진율이 7%에 불과한데 대형서점 등과 같이 할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4년 도서정가제가 부활했지만 예전 상황으로 회복되진 않았다. 책 구매층인 소비자와 공공도서관 등에서 이미 온라인 구매가 익숙해진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지역 서점이 살아남기 위해선 시대적 흐름을 읽고 독자의 요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선경 성공독서코칭센터 대표는 "출판과 독서, 서점의 활황기만을 추억하며 독자가 먼저 다가와주길 바라는 모습을 버려야 한다"며 "고객이 책이라는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했다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해야 하고 서점 운영 노하우, 독서의 본질, 창의적 아이디어 발상 등 서점인의 전문성을 높여줄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인천대 오용섭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서점은 새로운 문화·유행을 추구하는 장소인 만큼 새로운 복합도서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인구 감소로 거의 망해 가던 일본 큐슈(九州)지역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차도 마시고 책도 사고 볼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강원 속초: 56년 된 서점, 카페처럼 '파격 변신' 성공

이런 상황에서 온라인 서점의 활성화로 경영난에 빠졌다가 판매 방식을 혁신해 성공한 지역 서점 사례가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 받는다.

강원도 속초시 교통 '동아서점' 사례다. 56년 문을 연 이 서점은 독특한 운영 방식으로 거대 서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동아서점은 2015년 1월 매장을 3배가량 확장·이전해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서점 내부 면적은 429㎡(약 130평). 내부에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창가에 바 형태의 테이블이 있고 중앙엔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또 곳곳에 나무의자들이 있어 50명가량은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

강원도 속초 동아서점
60년 이상 전통을 이어온 강원도 속초 동아서점.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속초 동아서점 김일수 대표(왼쪽)와 아들 김영건씨. [프리랜서 김성태]

매달 자체 베스트셀러 목록도 발표한다. 순위 발표에만 머무르지 않고 저자를 초청해 강연을 열기도 한다. 책 분류 방식과 배치에도 나름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맛있는 책 한 그릇'이란 코너를 만들어 음식 관련 책을 배치하고 '내 삶의 동반자 반려동물 이야기' 코너엔 동물 관련 책을 모아두는 식이다.

아버지 김일수(66) 대표와 함께 서점을 운영하는 김영건(31) 팀장은 "서점을 확장·이전하면서 공간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다. 사람들이 서점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게 만들까가 핵심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