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는 예술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상파 미술시대를 연 에두아르 마네(1832~1883).
그의 한마디는 전통 회화를 거부하는 변혁이었다.
순간의 빛을 포착했다. 새 화풍은 관습을 깨는 도전 끝에 창조됐다.
누드 크로키도 그렇다. 열정이고, 혁신이고, 치유(힐링)다.

”오늘은 5분, 3분입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명동갤러리 권대하 원장(54)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화실은 무념무상의 창작 마을이 된다.
여성누드모델이 가운을 벗었다.
포즈를 취한다. 뒷모습이다. 누드모델의 몸은 앙상해보였다.
3년차 모델이다. 모델은 음악에 맞춰 부드러운 동작으로 첫 포즈를 잡는다.
크로키를 시작 하려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모델의 포즈에 강한 스토리가 느껴져서다. 살짝 구부린 두 발이 견고하게 몸의 중심을 잡는다.
외로움을 끌어안은듯 잔뜩 웅크린 자세다. 구부린 등의 척추뼈가 뚜렸하게 드러난다.
얼굴은 모로 뉘어 한쪽 귀가 움츠러든 어깨에 눌려있다. 애처로움이 잔뜩 묻어난다.
황량한 겨울 벌판, 눈폭풍 속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홀로 남겨진듯하다.
오그라든 두 손은 입가에 모여있다. 꽁꽁 언 손가락을 입김으로 힘겹게 녹이는 듯한 자세.
연필을 쥔 손도 얼어 버렸다.
화실은 터질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해진다 숨이 막힌다.

“멋있다.” 아니 “아름답다.”

짧은 전율이 감동으로 바뀐다. 급히 정신을 가다듬는다. 크로키북에 올려진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크로키의 매력은 ‘거침없는 빠름’이다.
2시간이 2초처럼 지나갔다.

3분 만에 탄생한 ‘상남자의 몸’

'인간의 몸은 예술품이다'

누드크로키는 화가, 모델, 음악의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완성된다.
화가는 예술혼을 불태우고, 모델은 감동을 주는 포즈를 만든다.
음악은 화가와 모델의 감정을 휘감는다.

‘슥삭슥삭’ …‘슥슥슥’ …

이번 누드크로키 모델은 남자다.
근육이 잘 다듬어진 남자 모델은 아름답다.
인간의 몸은 예술품이다.

살짝 관절만 비틀어도 힘줄과 연결된 근육들이 요동 치는듯 꿈틀거린다.
남성 특유의 힘이 느껴진다.
화실에는 모델이 준비한 음악과 빠르게 연필 긋는 소리만 가득 하다 몸과 마음이 급하다.
거침없이 움직이던 4B 연필이 모델의 목과 어깨라인에서 멈칫 거린다.
방황하는 연필은 급하게 복부와 옆구리로 내려오지만 난감해진다.
남성미의 상징 초콜릿근육이다. 근육의 특징과 흐름을 2~3초 만에 그려야 한다.
자신 없는 부분이기에 대강 얼버무린다.
허리선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둔부에서 연필이 또 멈칫 거린다.

크로키의 특징과 매력은 스피드. 그릴 때 마다 늘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낀다.
어떤 포즈를 취하든 반복되는 머뭇거림이다. 모델의 포즈가 바뀐다.
덜 그려졌지만 미련 없이 도화지를 넘긴다.
3분 만에 작품이 탄생한다.
잘 그려 완성시키고 싶다. 현실은 냉정하다.
의욕은 ‘에곤 쉴레’인데 손목은 ‘에고 쉴래’이다.

'외설' 편견 버터낸 힘

'누드는 예술의 기본이고 본질이다'

누드 크로키가 국내에 본격 소개된 건 90년대 후반부터.
명동갤러리 권대하 원장은 2001년 2월에 다음 카페
‘그림을 배우자’를 개설했다.
당시 회원만 4만명. 그는 대한민국의 중심지 서울 명동에 화실을 열었다.
당시만해도 명동은 문화와 상업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문화는 점차 사라져갔다.
그는 황폐화된 문화를 살리고 싶었다. ‘누드크로키’반을 만들었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주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죠”

처음부터 어려웠다. 수강생이 기껏 5명 정도. 모델 구하기도 힘들었다. 누드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다.
“외설이다”라는 지적이 많았다. 적자가 쌓였다. 포기했다.

“견딜 수 없더군요. 하지만 다시 마음을 먹었습니다. 누드는 예술의 기본이고 본질이거든요.
특히 크로키는 유화나 수채화와 달리 빠르게 실력을 쌓을 수 있어요. 초보자에게 유용한 장르지요.”

이번에는 초보자들에게 집중했다.
부활했다. 수강생이 몰렸다. 30~40명이 화실을 채웠다.
이들은 저마다 ‘그리기’에 대한‘그리움’을 갖고 있다.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꿈을 찾기 위해 화실 문을 두드렸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현재 국내에서 누드크로키 강좌가 개설된 곳은 10여곳.
지리적인 접근성과 화실의 편안한 분위기가 중요하다.
강좌는 꾸준히 늘고 있다.

“어, 이게 크로키였어?”

“나는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다”

첫째 주는 분명 ‘취재’를 간 거였다. 멋모르고 선배 따라간 곳에는 풍만한 몸매의 여자 모델과 화가들이 있었다.
무작정 따라 그렸다. 모두의 폭풍 칭찬이 이어졌다. “다음주는 남자 누드 모델이야.”
“어머 부끄러워!”할 나이는 아니다. 능청스럽게 “필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남자의 나체를 2시간 동안 뚫어져라 봐야 한다니. 갑자기 질문이 생겼다.
“누드 크로키 할 때 거기도 그리나요?”

물론 작품(?)은 형편없다. 비례도 안 맞고, 근육도 엉성하다. 그래도 ‘크로키’니까 괜찮다.
그래서 좋았다. 모두가 20대에 ‘완성’을 기대하며 팍팍하게 군다.
완성된 스펙과 외모 없이는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 하나의 기준에 다가가려는 20대의 일원으로서, 힘들다.
세태의 사각지대에서 기꺼이 ‘미완성’을 아름답다 칭해주는 누드 크로키에 나를 투영해 본다.
한 순간이라도 쉬면 ‘잉여’가 되는 지금, 어쩌면 나는 ‘잉여로운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주 차. 다들 이젤을 세우고 드로잉 재료들을 꺼내 준비 중이었다.
나도 호기롭게 지난주에 산 크로키 북을 펼쳤다. 올 테면 와 보라지.
야구 모자를 쓴 한 남자가 화실 옆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온 그는, 가운을 입고 있는 누드모델이었다.
부산스럽던 화실이 가운이 벗겨지자 고요해졌다. 내 앞, 벗은 몸의 남자. 환한 형광들 불빛 밑에 완전히 노출된 그다.
연필을 들었다. 저 남자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피부가 참 하얗네.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결과 웬 흉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다시 그를 봤다.
이 부분은 이게 아니라 이렇게 생겼네. 근육이 여자 모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를 볼수록 보였다.
제대로 그리려 들수록 ‘남자’는 사라지고 ‘‘몸’이 남았다. 화실은 어떠한 선정성도 부정되는 묘한 공간이었다.
일주일 전, 처음 크로키를 했을 때가 다시 생각났다.

모델은 밝고 아담한 여자였다. 그녀는 허공에 걸려 있는 설치미술처럼 아름답게 포즈를 취했다.
포즈와 포즈 간은 우아한 동작으로 메워졌다. 누드 모델은 화가만큼이나 숙련의 과정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만큼 나는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래, 나 누드모델이다

내가 벗은 이유는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마감 시간이 다 됐다. 아쉽다. 붓놀림이 더욱 빨라진다. 모델은 기다려준다. 배려다.
마무리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모델은 일어서서 가운을 챙긴다.
연분홍빛 가운의 모델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지칠 법도 한데 환하게 웃는다. 수강생들 한 명씩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다.
4월 15일 명동갤러리 화실 안. ‘누드모델’ 한세빈(27 가명)씨의 한 주도 이렇게 지나갔다.
그녀는 춤을 추듯 마무리 스트레칭을 했다. 힘든 작업. 그녀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프로’였다.

“몸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싶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몸짓 하나만으로도 기억되고 싶었어요”

한 씨는 연극과 현대무용을 공부했다. 졸업 후엔 공연장에서 살다시피했다.
연기자의 꿈을 안고 열정을 뿜어내던 무렵, 그녀를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서울아트모델컴퍼니 권은진 회장. 조 씨의 유연한 춤동작과 몸의 곡선, 분위기는 누드모델에 제격이었다.

“저는 꿈만 같았어요.
누군가의 하얀 종이를 채워줄 사람, 작가들의 창의력을 깨워주는 사람, 학생들의 교재가 되는 사람.
누군가에게 꼭 필요하고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였죠. 망설임도 없이 찾아가서 바디오디션을 보겠다고 했어요”

누드모델이 되다

발레로 다진 기본기, 그렇지만 따라가기 쉽진 않았다.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버텨야하기 때문에 뼈마디마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손목과 발목, 무릎 쪽 관절염은 만성이 됐다.
처음엔 부끄러움보다는 긴장감이 더 컸다.
2시간동안 다리에 힘을 주면서 쥐가 나기도 했다.
하루종일 노동을 한 사람처럼 피곤하고 더딘 시간이었다.
타이머가 있어도 시간을 제 때 맞추기 힘들 정도였다.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화실 환경은 더욱 힘들었다.
히터시설이 없고 방석조차 준비돼 있지 않은 화실은 열악했다.
거기서 꼬박 6시간을 버텼다.

“추운 겨울 난로도 없고, 돗자리 하나 없는 딱딱한 바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날은 정말 끔찍했죠.
몸이 움츠러들면서 자세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뻣뻣하게 굳은 몸은 시간이 지나자 떨리기 시작했죠.
집에오자마자 며칠간 감기몸살로 앓아누웠는데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숨쉬는 조각상

한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철저한 스트레칭과 운동밖에 없었다.
다른 모델과 차별화도 필요했다. 나만의 개성이었다. 한 씨는 화실에서도 연극배우가 되기로 했다.
공연을 하듯 몸에 감성을 넣었다. 발레를 하듯 연결동작을 바꿔나갔다.

“음악에 맞춰서 즉흥으로 포즈를 취해요. 대부분 그날의 회원, 분위기를 봐서 음악을 선정하고 자세를 취한답니다.
예를 들면 빠른 포즈를 원하는 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이 많으면 신나는 음악에 맞춰 과감한 동작을 취해요.
딱딱 끊어지는 포즈보다 음악과 어울리게 부드럽게 연결하는 포즈를 찾으려고 노력해요.”

조각상을 대신하는 누드모델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생명력’이 있었다.
5년차 베테랑답게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호흡까지 할 정도가 됐다.
화가와의 소통은 조금 더 기다릴지, 다음 동작으로 바꿀지를 판단하는데 요긴했다.
이제는 한 씨를 챙기는 팬도 생겼다.
포즈가 마음에 든다며 액자에 넣은 그림을 선물로 받은 적도 있다.
가끔 식사를 거르고 올 때면 먹는 포즈로 해달라며 간식을 먹여준 분도 있었다.
다이내믹한 직업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이 많았다.

에너지 넘치고 긍정적인 나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2시간 동안 모델을 서면 수입은 고작 6만~7만원. 적은 수입에 그만두는 동료가 늘어났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밀려들었다. 흔들렸다.

“활동 초반에는 크고 작은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팔이 없는 저의 모습, 다리가 짧고 배가 풍선처럼 부푼 그림에 자신감도 없어졌죠.
무엇보다 누드모델을 저급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서 첫 대면하시는 분들 때문에 가장 힘들었어요.
누드모델이라고 하면 선입견을 갖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종종 실례되는 행동을 하는 분도 계시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외국에서는 누드모델이 오페라, 뮤지컬 등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누드가 예술로 자리잡힐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대형 공연장에서 활동도 많이 하고 인정받는 누드모델이 될 테다.

“운동을 더 꾸준히 해서 선이 좋은 모델, 포즈가 좋은 모델이 되고 싶어요.
유연성을 더 늘려서 석고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포즈를 만들어 작가들의 창의력을 일깨우고 싶은 거죠.”

그녀는 아직까지 주변에 자신의 일을 밝히지 못했다. 자부심을 느끼는데도 선입관을 갖고 보게 될까봐 겁이 나서다.
기자에게도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은 가급적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언젠가 누드모델한다고 말하면 ‘그런 망측스러운 일을 어떻게 하니’가 아니고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을 내가 보고 있구나’라는 얘기를 듣게 될 날이 오겠죠?”라고 말했다

누드모델협회 권은진 회장

누드모델협회 권은진 회장 사진

몸으로 소통하는 예술

“누드모델은 몸으로 예술가와 소통합니다. 작품에 영감을 주지요.”

누드모델협회 권은진 회장(40)은 말한다.
13년 경력의 권회장은 아직도 현역이다. 그를 그리고 싶어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쭉쭉 빵빵 체형이 아니더라도 누드 모델이 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벗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죠.
사막 한 가운데서, 또는 한 겨울 계곡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체력과 지구력도 필요하죠.”

몸매에 자신감을 갖고 누드모델이 되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잠깐 돈벌기 쉽다는 생각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런 모델들, 대부분 오래가지 못한다. 책임감과 성실함이 배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모델 지원자도 많다.
보디 테스트를 하는데 남성 지원자가 오히려 여성 지원자보다 몸을 사리고 부끄러워한다고.
현재 누드모델협회(서울아트모델)에 소속된 모델은 40여명. 그외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모델은 3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미의 개척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포즈의 완성도가 정점인 순간, 전 귀를 기울입니다. ‘찰칼 찰칵’ 셔터 소리나,
도화지를 휘젓는 ‘사각 사각’연필 소리가 들릴 때 모델은 작가와 함께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고마워, 크로키 - 정혜승 -

“엄마는 꿈이 뭐야?.” / “엄마 꿈은 화가야.”
“엄마 지금 화가 아니야?.” / “응. 엄만 미술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화가는 아니란다.”
경기도 부천 상동 아파트 안. 정혜승(45)씨는 20년째 아동심리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잘 그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잘 생각하기 위한’ 방법을 깨우치게 도와준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한 정씨는 학원을 꾸렸다. 매일 12시간 이상 열정을 바쳤다.

“2년 전에 아들이 난독증이란 걸 알았어요. 심리 상담소에 갔다가 알게 됐죠.
심리미술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정작 제 아들이 아파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땐 제 자신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우울증까지 찾아왔어요.”

20년 이상 앞만 보고 달려온 결과는 처참했다. 정씨는 ‘브레이크’를 걸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어디로 갔을까?
해답은 옛사랑에 있었다. ‘크로키’였다.
정씨의 작품은 사람의 몸이 기괴할 정도로 과장돼있다. 어쩔 땐 운율이 있는 악보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동안 완성된 작품을 보고 사람의 몸이라고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누드크로키에 색채를 생략한다. 단순화를 한다. 그리고는 유화로 재탄생시킨다.
최근엔 작품에 모델의 감정을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심리미술과 누드크로키의 ‘결합’이다.

“누드크로키는 제 인생의 ‘영양제’같아요. 안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걸 먹고 건강해졌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에너지가 생겼어요. 무희가 춤을 추듯 모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선을 느낍니다. 목표도 생겼죠. 작업을 할 때도 구체적으로 테마를 이렇게 잡아 보면 좋지 않을까? 이렇게요. 그래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요. 누드 크로키를 할 때면 나 자신이 멋있어져요.
현역에서 활동 중인 유명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겨요.”
정 씨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도 지나갔다. 아들은 고난을 잘 이겨냈다.
정씨는 아이와 함께 꾸민 화실 벽에서 원하던 그림을 그린다.

영국신사, 누드크로키 만나다 - 스티브 웨스트배리 -

“째깍째깍.”
손놀림이 시계 리듬에 맞춰 바빠진다.
연필을 잡은 그의 손끝도 떨리기 시작한다. 하얀 도화지 위에는 여성의 나신이 차곡차곡 채워진다.
영국출신 화가 스티브 웨스트배리(e.33)가 명동갤러리에 온 지도 다섯 해가 지났다.

그에게 누드크로키는 ‘안식처’다. 하루 16시간의 고된 영어강사 일도 이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다.

“그림이 절 버티게 해줬어요. 내 상상력을 살아있게 지켜줘요. 매일 같은 일을 하는 일상적인 삶에,
나만의 상상력으로 어떤 것을 창조해낼 수 있잖아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는 누드크로키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러프버러(Loughborough)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스티브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누드크로키반’을 직접 개설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내 유승희(42)씨를 만났다.
사랑은 예술과 함께 찾아왔다. 부부는 명동갤러리의 ‘토박이’가 됐다.

“처음엔 긴장을 많이 했어요. 동양모델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죠. 영국 모델의 자세는 정적인 편이에요.
굳어있고 각이 딱딱하게 져 있어요. 한국 모델들은 우아하고 동적이에요.
일반적으로 한국 모델이 포즈가 더 많고 더 힘든 포즈를 구사해요. 더 역동적이죠.”

매주 작품이 쌓일 때마다 그림도 새롭게 태어났다.
연필로 강하게 표현했던 여인의 굴곡미는 시간이 지나 색이 더해지며 생명력을 가졌다.
초기에 스티브는 선을 완성하는데 급급했다. 색감도 다양했다. 그림 속 여인은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돼있었다. 스티브는 물감을 던져버렸다. 색연필과 연필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은 다 그리지 않았다.
여백은 색으로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여인은 캔버스 위에서 생생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실패해도 괜찮아 - 이병헌 -

이병헌(58) 화백은 누드전문 화가다.
경북 김천 출신의 그는 계명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미술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1991년부터 전업 작가로 나섰다.
졸업 직후부터 누드화가로 나섰다.

미대 졸업 후 개인전을 열었다.
다른 그림보다 유독 누드그림이 호평을 받았다.

“누드만의 매력은 포즈에 맞춰 변화와 조화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입니다. 배경을 어떨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색채 배경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수천장 그렸는데도 새 모델을 보면 새로운 게 나옵니다.”

대부분의 화가는 자신이 잘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크로키는 이 ‘무덤’에서 빠져나오 게 한다.
예술가의 감각은 살아난다.

“유화는 밤낮으로 작업해도 꼬박 한 달 이상이 걸려요.
마르는 데만 3~4일이죠.
반면 크로키는 한 시간에 10점 이상을 그릴 수 있어요.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긴장감과 성취감이 최고에요.
또 실패해도 괜찮아 얼마든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죠.”

52년생 용띠, 나이가 중요합니까? - 장세열 -

장세열(62) 씨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베이비부머 1세대, 전쟁이 쓸어간 보금자리에는 먹을 게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은 빌어먹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60년대 그는 남다른 꿈을 꾸었다. 바로 ‘그림’이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상대를 갔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를 다니면서 그림 컬렉션을 시작했다.

IT와 무역, 홈쇼핑, 부동산에 손을 뻗었다. 리조트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사업이 성공할수록 다시 ‘그려보자’는 꿈도 솟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 붓을 들었다.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슬럼프에 빠졌다. 포기할까.

“유화를 하면서 발전이 늦고 답답함을 느꼈어요.
그때 누드크로키가 눈에 들어왔어요. ‘구세주’랄까.
단시간에 승부가 나는 크로키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쌓인 분노를 다 날려버리고 훨훨 날아가는 느낌이랄까요.”

10년 전 만에도 친구들이 타박했다. ‘사내가 무슨 그림이냐’는 핀잔이었다.
지금은 부러워한다.
은퇴 후에 할 만한 취미가 없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릴 줄만 알았던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이다.
이들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곧 ‘두려움’이다. 장 씨는 이 문턱을 뛰어넘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있다.

가가의 깨알 가이드

어깨 힘 빼고, 연필 잡아야

‘질주하는 연필선의 쾌감, 즉석에서 얻는 성취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
누드크로키는 해방의 예술, 자유의 예술이다. 누드크로키를 즐기는 계층은 다양하다. 자식들 다 키워놓고 여유를 즐기는 주부, 부모의 반대로 화가의 꿈을 접었다 다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중년의 사업가, 취미로 크로키에 빠진 샐러리맨 등이다. 대학생들도 빠지지 않는다. 누드크로키는 미술대학 새내기들이 기본을 다지는 수업으로도 중요하다. 근육의 형태와 뼈의 구조를 익히며 기초 조형능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영상학과ㆍ애니메이션학과 학생들도 누드크로키에 빠져든다. 인간의 동작을 이해하고 영상이나 애니메이션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크로키가 필수다.

크로키의 특징은 불필요한 표현을 생략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잘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면 좋은 크로키가 나오기 힘들다. 어깨에 힘을 빼고 연필을 잡아야 실력이 늘어난다. 5분, 3분, 1분 간격의 진행이 일반적이다. 처음 5분 간격은 손목을 풀며 명암과 양감, 디테일한 부분을 표현하는 여유가 있다. 3분 간격은 ‘긴장과 몰입’이다. 도화지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간다. 1분 간격은 가장 숨막힌다. 째깍째깍, 1초가 아쉽다. 긴장된 눈빛으로 누드모델의 머리끝부터 발가락끝까지 낚아채야 한다. 내게 ‘말’을 거는 아름다운 포즈를 60초 안에 그림으로 그려 ‘답’을 해야 한다.

화실

* 2014년 9월 현재 기준이며 변경될 수 있습니다

학원

* 2014년 9월 현재 기준이며 변경될 수 있습니다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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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 현재 기준이며 변경될 수 있습니다

Q&A

  • Q 누드크로키란.

    A 누드와 크로키의 합성어, 남자 혹은 여자의 벗은 몸을 5분, 3분, 1분, 30초 등 짧은 시간내에 그림으로 표현하는것

  • Q 누드크로키 모델은 어느 정도 노출을 하나.

    A ‘누드’라는 단어가 말하듯 남여 모델 모두 아무것도 입지 않고 포즈를 취한다. 누드크로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야릇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직접 체험해보면 진지한 예술의 열기에 빠져들게 된다.

  • Q 어디서 누드크로키를 배울 수 있나.

    A 미술학원(입시위주), 화실(일반인 대상) 문화센터(원데이 클래스)등에서 배울 수 있다.

  • Q 누드모델은 누구나 할 수 있나.

    A 미성년자를 제외하고 특별히 신체적인 조건의 제약은 없다. 몸에 큰 흉터만 없으면 된다. 누드모델은 프로다. 고정 자세를 견뎌야 하는 체력과 끈기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포즈를 연구하는 성실함도 필요하다.

  • Q 누드모델 보다 사진을 보고 그리면 안 되나.

    A 사진이나 잘 그린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것도 공부가 된다. 하지만 모델을 직접 보고 그릴 때 경험하는 질감과 양감같은 입체감은 평면적인 사진과 그림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분이다.

콘텐츠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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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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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XUI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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